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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장 자가당착적 직업은 의사와 성직자
작성자
법향
작성일
2011-04-05
조회
16776



                

Name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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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onghyun.com
Subject  
   가장 자가당착적 직업은 의사와 성직자
송현 시인 명상편지(83)

가장 자가당착적 직업은 의사와 성직자


나의 영적 스승 라즈니쉬는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가당착적인 직업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의사라는 직업; 그것은 자가당착적인 직업이다. 만일 의사가 최종적으로 세상에서 모든 질병을 없애버리면 그는 자살을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치료를 하지만 - 그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더 좋은 방법과 기술과 약을 찾으려 노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 깊은 곳에서 그는 실패하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는 무의식적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의 성공은 곧 자멸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에서 모든 질병이 다 사라진다면 의사의 역할이 무엇이 되겠는가?

의사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그가 병을 고치기 때문이 아니라 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공자는 매우 현명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이다. 그대는 의사가 그대를 돌봐줌으로써 그대가 병들지 않은 것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병이 들었다면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 사실 그가 그대에게 지불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의사라는 직업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의사는 그대의 질병에 의존해서 삶을 살고 번창한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프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 어떤 전염병이 돌 때, 의사는 그것을 ‘시즌, 한창 때, 좋은 기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다.

그와 똑같은 것이 더 광범위한 의미로, 더 깊은 의미로, 성직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성직자들은 그대가 두려워하고 공포에 사로잡히고 무서워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면, 성직자들은 완전히 쓸모없게 된다. 누가 그에게 가겠는가? 무엇을 위해서? 그대는 누군가가 그대를 위로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에게 간다. 그대는 누군가가 그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를, 그리고 이 매우 불안한 삶 속에서 확실하게 안심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성직자들은 사람들이 미친 상태에 있는 것을 바란다. 오직 그때만이 그와 그의 직업이 번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불안정한 것이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삶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안전하다. 그러나 삶은 불안하다. 결혼은 안전하지만 사랑은 불안하다. 결혼은 죽음이지만 삶은 살아 있다. 그대가 더 생생할수록, 그대의 삶은 더 불안전하다. 더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미지의 것을 탐구하게 될 것이고 더 모험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삶의 본성이고 법칙이며 본질적인 핵심이다. 그러나 성직자는 그것을 악용해왔다. 성직자는 그대에게 현생뿐만 아니라 내생에 대해서도 위안과 안정성과 손실에 대한 대비를 보장해준다. 그는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 어떤 규율을 따르면, 어떤 성격을 계발하면, 경전에 쓰인 계율을 따르면, 그때 그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신은 그대에게 상을 줄 것이다. 그대는 관습과 전통을 위배하는 경우에, 오직 그때만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만일 그대가 그를 거역한다면 이다. 그는 전통과 관습과 과거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거역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결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코란에 거역하면, 성경에 거역하면, 베다에 거역하면, 그대는 벌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신성한 경전이기 때문이다. 신 그 자신이 이 경전을 썼다. 문자 그대로,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야 한다. 옆으로 비껴가면 커다란 위험을 맞게 될 것이며 그때 나는 그대를 도울 수 없다.”

성직자들은 그와 그의 계승자들이 그대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구속과 굴레 안에서만 머물러 있으라고 계속 말한다. 그것은 감방이다. 그는 그대가 바깥의 공기와 태양과 별과 하늘을 매우 두려워하게 만든다.

새들의 세상에 성직자들이 있었다면, 어떤 새도 날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둥지에만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붓다, 예수, 짜라투스트라, 노자와 같은 소수의 미친 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 미친 새들은 통례가 아니다. 그들은 예외일 뿐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항상 그들에게 대항하고 반대할 것이다. 기억하라.

성직자들은 예수를 반대했다. 성직자들은 붓다를 반대했다. 짜라투스트라를 반대했고 노자를 반대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왜 성직자들은 그들을 반대했는가? 자기 직업의 뿌리를 잘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말을 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위험에 부딪히며 살라고, 반역자처럼 살라고, 과거로부터 죽고 현재 속에서 살라고 말하고 있었다.

붓다는 말한다.
  “그대 자신에게 빛이 되어라.”
이제 그는 성직자가 설 자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성직자들은 말한다.
  “내가 빛이다. 다른 빛은 필요 없다. 나는 신성한 전통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내가 오랫동안 횃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대 자신의 사적인 빛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붓다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대 자신에게 빛이 되어라.” 였다. 그는 그것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 중의 하나인 아난다에게 말했다. 붓다가 죽기 전에 말했다.
    “이제 마지막 날이 왔다. 나는 오늘 떠나야 한다. 내 배가 도착했다. 나에게 질문이 있는가?”
제자들에게 말한 순간, 거대한 침묵이 있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아난다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붓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붓다가 말했다.
   “아난다여, 그런다고 득될 것이 없다. 왜 우는가?”
그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버리시면 저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저는 어둠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붓다를 다시 만날 만큼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우주 속으로 들어갈 것이고 저는 다른 생에서 다른 붓다를 만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붓다를 만난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42년동안 당신과 함께 있었지만 그 모든 기회를 다 허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울고 있습니다. 저는 부끄럽습니다. 제가 바보였다는 것이 서럽고 불쌍해서 울고 있습니다.”
  붓다는 웃으며 말했다.
  "아난다여, 그대는 나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나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대가 깨닫지 못한 것은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나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내가 계속 ‘의지하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가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책임을 동반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아무도 독립적인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던질 수 있기 위해 어떤 의지할 것을 찾는다.

  붓다는 말했다.
  "어쩌면 나의 죽음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하다; 42년 동안 나와 함께 있으면서 이제 그대는 다른 누구도 의지하지 못한다. 그대는 다른 붓다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난다는 붓다가 죽은 후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깨달음을 얻었다.
아난다에게 붓다가 작별의 메지지를 말했다.
  “그대 자신에게 빛이 되어라 "

어떻게 성직자가 붓다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가 자기 직업을 파괴하고 있다. 성직자는 그대와 미지의 신 사이에 있는 중개자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던 성직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실, 나는 모든 종류의 성직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신론적인 사람이다. 성직자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신을 믿을 수가 없다. 그는 그것이 자기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이것을 경험하고 있다.

나에게는 아주 멋진 친구가 있었다. 그는 벵갈의 신사였다. 그는 동종요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아플 때면 항상 대증요법의 의사를 찾아가곤 했다.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당신은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나았는데...”
거의 기적적인 치유가 그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신이 아플 때, 왜 대증요법 의사를 찾아가는가?”
그가 말했다.
  “사실 나는 그 설탕약을 믿지 못하네. 나는 그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네. 그것은 믿으면 효과가 있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 약을 만들었는데! 어떨 때는 그 약은 그냥 설탕일 뿐이라네. 사실, 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놀랍네.”

이유는 질병의 90 퍼센트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요법들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대증요법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질병의 90 퍼센트는 거짓이고 거짓 질병에는 대증요법이 위험하다. 질병이 거짓인데 대증요법은 진짜 약을 주기 때문이다. 그 진짜 약은 그대에게 어떤 작용을 하게 되어 있다. 거짓된 질병에는 거짓된 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해가 될 수가 없다. 동종요법이 사람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동종요법의 약병에서는 큰 빨간 글자로 “독”이라고 쓴 것이 없다. 동종요법은 결코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도움을 준다. 그대의 질병이 거짓일 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약을 주고 있는 사람을 신뢰하면 그 신뢰가 그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성직자는 그의 신들을 믿지 못한다 - 불가능하다. 개가 그의 신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쥐가 그의 신 위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사실, 신은 그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 없이는 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신 주위에 경배와 기도와 향기와 빛과 꽃과 오랜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어떤 심리적인 분위기다. 그는 그대를 이용해 먹기 위해 헛된 현상 주위에 어떤 영적영역을, 어떤 심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대에게는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자, 신은 매우 모호하다; 그대는 그런 모호한 개념에 의지할 수 없다. 그대는 신을 대표할 수 있는 단단하고 실체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성직자의 일이다. 그는 사원 문 앞에 서서 말한다.
  “그대는 신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볼 수 있다. 그대는 나를 의지할 수 있다. 나를 따를 수 있다.”

(주)
나의 영적 스승의 이런 놀라운 메시지 때문에 어리석은 내가 눈을 뜨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스승의 발 아래 고개 숙여 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말의 주저없이 제자로 입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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