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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책감-조춘호!!!
작성자
정무흠
작성일
2011-01-23
조회
10088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관용을 베풀었다. “이 경우에는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이제 그만 청각이 약해져서 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누구든지 죄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교훈)

살아가면서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 있는데 죄의식, 후회, 양심의 가책 등등이다. 이런 감정들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에게 가치 있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죄책감은 자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기준을 여겼으며 이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지침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죄책감을 해결키 위해 어떤 이들은 죄책감 자체를 부인하거나 억누름으로서 만회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법은 불행하게도 전혀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가 하면 이 감정에 완전히 항복해 버려서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기력상태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데, 이는 우리가 갖는 죄책감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우리의 잘못된, 혹은 실수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 행동을 취함으로서 변화를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생기는 감정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억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3~4)

 

 

연구 범위: 창 3:8~13, 요일 1:9, 시 32편, 딤전 4:1~2, 마 26:75, 롬 8:1.

 

죄책감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죄책감은 수치심, 두려움, 슬픔, 분노, 고뇌, 심지어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정들을 이용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끄시고,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죄책감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사고의 생존자라든지,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그와 같은 예이다.

한편 바람직한 죄책감은 선량한 양심으로 작용한다. 죄책감은 불편한 마음을 일으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하도록 만든다. 죄책감은 개인의 선택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것은 유다의 경우처럼 매우 파괴적일 수도 있고, 베드로의 경우처럼 매우 긍정적일 수도 있다.

이번 주 우리는 죄책감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교훈을 얻기 위해 네 개의 성경 기사를 연구할 것이다. 죄책감을 바르게 취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보게 될 것이다. 정말 너무도 많은 것들이 죄책감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그것에 대응하는 우리의 선택에 좌우된다.

 

 

일요일 1월 23일

수치심

 

도입)

해로운 수치심과 죄책감은 분명히 구분된다. 올바른 죄책감은 뭔가 잘못을 하거나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중심에서부터 드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죄책감도 나중에는 해로운 수치심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에릭슨은 많은 진보를 이룩한 제3의 심리학에서 죄책감의 학습됨과 그 자발적인 면에 대한 차이를 다루고 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죄책감은 수치심 보다 좀 더 성숙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자신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는 입장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가치관의 통합된 입장에서 나오는 경우인데 포슨과 맨슨에 따르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믿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정도이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결국 죄책감은 자신의 가치를 좋게 보고 있기에 그가 그 자신이 믿는 방향대로 나아가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수치심은 아예 자신의 가치를 좋게 여기지 않고 수치스럽게 여긴다. 행동이 아닌 존재에 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Facind Shame]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죄책감은 인류가 경험한 첫 번째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범죄한 직후, 아담과 하와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 이전에 없었던 이러한 반응은 아버지이자 친구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분을 대면하기 꺼려하는 그들의 수치심을 의미했다. 소중한 친밀감이 깨졌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과 수치심뿐 아니라 슬픔까지 느끼게 되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13).

 

죄책감은 자동적으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런 반응을 ‘투사(projection)’라고 불렀다. 이렇게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것은 인간관계에 좋지 못한 작용을 하고, 하나님의 용서에 장애가 된다.

진정한 해결책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엉뚱한 이유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살한 사람의 친족들, 대형 참사의 생존자들, 이혼 가정의 자녀들이 감춰진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예측할 수 없었던 사고에 대하여 그들이 책임을 질 수 없음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다. 정말 그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상처를 준 자들에게 용서를 구한 후, 다음과 같은 성경의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동이 서에서 먼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교훈: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부가적용)

죄책감이 들었을 때 하나님을 택할 수 있다. 죄책감이 들어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연락을 단절하고 힘들어하는 더 깊은 죄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위해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그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면서 새롭게 더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죄책감이 들었을 때 방향을 틀어 하나님께로 그렇게 마음을 다시 두는 것은 사실 쉽지 않고 더 거슬러 올라 산을 오르는 듯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죄책감이 들었을 때 우울함보다 하나님께 더 깊게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고..그것이 당신에게 더 유익이 되는 길인 것을 기억하자.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지금 어떤 문제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나는 종종 신앙적 의무에 충실하지 못한 생활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곤 합니다. 때로는 과거에 저질렀던 끔찍한 실수들 때문에, 또는 근절하지 못하고 있는 악한 습관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의 불행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말이나 행동, 해서는 안되는 은밀한 죄악들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 적용 |

죄책감을 품고 사는 것보다 그대의 죄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 영감의 교훈 •

▶ 죄와 죄인을 구별하시는 예수님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시대의 소망,462).

 

• 기도 •

아버지, 아버지는 저의 죄와 잘못을 모두 아십니다.

제 마음속에 그것들을 열거해 봅니다. 잘못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월요일 1월 24일

요셉의 형제들

 

 

도입)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미국에서 어느 한인이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집에 화재가 났는데, 집안에 있던 자기 아들이 화재로 죽은 것이다.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온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다” 라고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그때에 옆에 있던 경찰이 이 어머니를 살인죄로 체포했던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아들을 죽였다고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는데, 이 사실을 알고는 한국 변호사가 가서 그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돈 버느라고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모의 죄책감이 “내가 죽었다”고 통곡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미국인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경찰은 그녀를 석방해주었다고 한다. 죄책감,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이다. 이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이 오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죄책감은 과거의 특정 사고, 때로는 정신적으로 재연되는 어떤 형상이나 사건과 관련이 있다. 죄책감은 때로 짧은 회상이 삽입되어 나타나는 꿈이나 악몽을 동반하기도 한다. 목숨을 애원하는 어린 요셉의 모습은 형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두려움을 나타내며, 자기 비난에 몰입한다. 그와 같이 죄책감에 몰두해 있으면 심각한 고뇌와 좌절감, 달리 행동하지 못했던 자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 안타까운 것은 후회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에 상관없이 과거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와 용서가 필요하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하며 더 이상 스스로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행동을 선을 위해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들에게 책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모든 죄는 죄인과 하나님께 고통을 가져온다. 또한 대부분의 죄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나-다른 사람들이 모두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 5:16은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에게 더욱 그리해야 한다.

 

 

교훈: 과거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가지고 과거의 잘못에 몰두하기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가적용)

어떤 분이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여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몇 번이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그토록 많이 용서하라는 명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토록 반복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요한1서 5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죄를 짓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생활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회개할 때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죄를 이기게 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혹시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그대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죄의 기억들이 있습니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일을 생각만 하면, 등이 오싹하고, 마음이 어두워지며, 자신감이 사라집니다. 내 인생의 큰 오점같이 느껴지고, 모든 불행과 저주의 원인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께 여러 번 회개하였지만, 여전히 그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용서하셨을 텐데 이 죄책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적용 |

 

죄책감에 시달릴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재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영감의 교훈 •

 

▶ 죄책감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봄

“구주께서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무한한 사랑을 가지셨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서 개선의 가능성을 보신다. 거룩한 능력과 희망을 가지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주신 자들을 환영하신다.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 선한 일에 풍성한 생애를 살 수 있다”(교회증언 7권, 225).

 

• 기도 •

예수님, 제 죄가 너무 중하여 아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음을 믿습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말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내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자유함을 주옵소서.

 

 

화요일 1월 25일

진액이 빠짐

 

 

도입)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난, 재채기, 사랑 등이다. 가난의 영역은 참으로 넓어서 화려한 옷 한두 벌로 쉽게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터져 나오는 기침이나 재채기도 감추기가 어렵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면 아무리 그것을 감추려 해도 환한 얼굴로 다 드러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창밖이나 허공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 사람은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자루 속의 송곳은 감출 수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고 보면 감출 수 없는 것 중의 한 가지가 ‘자루 속의 송곳’인 셈이다. 송곳은 끝이 뾰족한 도구로, 종이나 나무에 작은 구멍을 뜷는 데 쓰는 연장이다. 두꺼운 종이나 나무, 가죽을 뚫는 송곳이 어찌 헝겊이나 짚으로 만든 자루를 뚫지 못하겠는가? 자루 속에 송곳이 들어 있다면 아무리 송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여도 자루가 흔들릴 때마다 송곳은 삐져나올 것이다. 따로 막을 길이 없고, 감출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아무리 감춰 두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것, 그 중에는 우리의 죄악도 있다. 자루 속에 송곳 감추듯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눈을 가릴 길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내 내면의 뼈가 쇠하여진 것은 송곳 감추듯 죄악을 내 안에 감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 속의 죄악이 속에서 나를 찌르기 때문에 상처와 아픔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 속에 삐져나온 송곳이 있다면 어리석은 일, 거울 앞에 서듯 나를 살필 일이다.

 

 

양심의 명언)

“양심이여! 양심이여! 신성한 본능이여, 영원한 하늘의 소리여, 무지에 둘려 싸인 총명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믿음직한 안내자여, 인간을 하나님과 닮게 하며 선과 악에 대하여 가오를 범함이 없는 심판자여, 인간의 본성을 탁월하게 하며 인간의 행위를 도덕에 따르게 함은 바로 너인 것이다.”(세계를 움직인 명언, P.64 - 루소)

◎ “양심이란 모든 사람 속에 살고 있는 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양심은 그러한 인식인 경우에만 인간생활의 충실한 인도자가 된다. 헌데 사람들은 이 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나쁘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생각을 양심이라고 생각하기 쉽다.”(세계를 움직인 명언, P.164 - 톨스토이)

◎ “다수의 사람은 육체로써 국가에 봉사한다. 소수의 사람은 두뇌로써 국가에 봉사한다. 극소수의 사람은 양심으로써 국가에 봉사한다.” 미국의 유명한 사상가요 문필가인 헨리 소로의 저술 [시민의 항의]라는 책에 기록된 말이다. 이 책은 간디가 자신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열권의 책 중 하나로 꼽고 있는 책이다. 소로는 자연을 한없이 사랑하여 월덴이라는 숲속에서 일생 독신으로 간소한 생애를 보냈다. ‘간소한 생활, 高遠(고원)한 사색’이라는 워즈워드의 말을 지표로 삼고 살았다. 그는 미국 정부가 침략전쟁(멕시코 전쟁)을 한다고 보았기에 납세를 거부함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 때 감옥에서 [시민의 반항]을 주술했는데 단지 25페이지의 글이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 안병옥 - (좌우명 365일 P . 125)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3~5).

 

다윗이 입을 열지 않았을 때 마음의 상태는 어땠는가? 정직한 고백은 정신뿐 아니라 육체에도 유익하다. 죄책감을 품고 있었을 때 다윗은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지는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오늘날 건강 전문가들도 정신적 스트레스와 신체 질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십여 년 전부터 의학계에서 ‘정신신체증(psychosomatic disease)’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대개 심리적 과정에 의하여 야기되는 신체적 증세를 의미한다. 근래에 심리신경면역학(psychoneuroimmunology)에서는 질병으로부터 우리 신체를 보호하는 데 있어서 정신의 상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윗은 죄책감을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5절). 결국 주님의 큰 용서를 통하여 죄 때문에 생겼던 수치심, 양심의 가책, 슬픔과 좌절감이 사라지고, 대신 기쁨과 행복이 이르러왔다(11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반면 양심이 화인을 맞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불이 신경의 끝을 태우면 신체의 일부가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1) 아무 가책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옳은 원칙들을 범함으로, 2) 또는 잘못된 것을 구별 못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선하게 보는 환경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을 때에 양심도 무뎌질 수 있는 것이다.

 

 

교훈: 죄책감을 품고 있으면 병이 되지만, 그것을 주님께 아뢰는 자는 건강을 잃지 않는다.

 

 

부가적용)

성경 속에 나타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룟 유다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나지 않았으면 좋을 자”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주님이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지라도 가룟 유다의 마지막 모습들은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선생이신 예수님을 판 후에 심각한 고민과 후회를 한다. 그는 이미 물이 엎지러진 다음에 상황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받았던 돈을 돌려주면서 원점으로 돌리려 하였지만 이미 종료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죄를 토로 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 고민하여 불행 속에 거하다가 스스로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가룟 유다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첫째는 그의 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이유는 그 죄를 토로하고 해결할 수 없었던 데서 온다. 성경에는 가룟 유다와 견줄만한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다윗이다. 다윗도 남의 아내를 범하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이 밝혀질까봐 그 남편을 죽인 흉악한 범죄자였다. 그런데 가룟 유다와 달리 다윗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차이점 때문이다. 그것은 다윗은 죄를 토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회개 후 새로운 마음을 얻었다.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시32:5 공동번역) 단 한가 지 차이점, 그것은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에 묻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신을 죽였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그 죄를 토설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회개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연약한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까? 아니면 느끼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입니까?

죄책감을 품고 있을 때 우리 마음과 육체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있다면,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무뎌져 더 이상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약한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스런 일입니다.

 

 

| 적용 |

스스로 판단하기에 어떤 특정 죄를 어느덧 별로 심각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영감의 교훈 •

▶ 안으로부터의 변화

“양심을 각성시키라. 그러면 많은 것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을 각성시키고 변화시킬 수 없다”(교회증언 4권, 552).

 

• 기도 •

하나님, 너무 늦기 전에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제 양심이 고장 났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셔서 고쳐 주옵소서.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기를 원합니다.

 

 

수요일 1월 26일

통곡함

 

 

도입)

미국의 유명한 부흥가 무디 선생에게 어느 날 한 청년이 몹시 근심 어린 표정으로 찾아와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인데 그만 큰 시험에 들어서 주인의 돈을 1,500달러나 훔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께 돈을 돌려 드리고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데 거의 써 버리고 남은 것이 얼마 없습니다. 남은 돈으로 장사를 하여 1,500달러를 받은 후에 갚으려고 하는데 어떨까요?” 청년의 말을 곰곰이 듣던 무디 선생은 “훔친 돈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남은 돈이라도 우선 돌려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렇게 하고는 싶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 선생은 그 청년과 함께 주인을 찾아 갔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주인은 “나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니 오히려 나도 기쁩니다.”라고 말하며 그 청년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다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교훈)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바다 가재(lobster)를 닮았다. 바다 가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속살을 보호해 주던 단단한 옛 껍질을 스스로 벗어 버리고 더 커다란 새 껍질을 뒤집어 써야 한다. 이처럼 낡은 껍질을 벗어 버리는 과정을 ‘탈피’라고 부른다. 바다가재는 5년간의 성장기를 보내면서 무려 25번의 탈피 과정을 거치며, 다 자란 뒤에도 1년에 한 번씩 껍질을 벗는다. 탈피는 끔찍하고도 성가신 과정이다. 낡고 단단한 외피가 압력을 받아 쪼개지면, 바다 가재는 모로 누운 채 근육을 꼼지락거려 벌어진 각질 사이를 빠져나온다. 낡은 껍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외피가 생길 때까지, 불과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바다 가재는 외부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벌거벗은 상태에서 지내야 한다.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낡고 단단한 껍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한다. 케케묵은 관습을 벗어나자면, 한꺼번에 밀려드는 괴롭고 고된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두 번에 걸쳐 베드로는 자신의 신념은 확고하기 때문에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만에 베드로는 자신을 알아본 두 여인들에게 각각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들이 그를 알아보자, “나는 아니라”고 맹세하였다(요 18:25). 그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과 종들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사실이 베드로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더했을 것이다.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베드로의 통곡은 마음의 변화와 진정한 회개로 그를 이끌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정체를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주님을 배신하는지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깨어지고 주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가운데 그는 겟세마네동산 조용한 곳으로 갔으며, 그의 구주께서 엄청난 고뇌를 인하여 땀구멍으로부터 피땀을 흘리며 엎드러지셨던 곳, 바로 그 장소에 엎드렸다. …그의 교만한 심령은 부수어졌으며, 얼마 전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의 피땀으로 얼룩졌던 잔디를 그의 통회의 눈물로 적셨다. 그는 회심한 사람이 되어 그 동산을 떠났다. …그는 겸손해졌으며, 연약하고 과오를 범하는 이들에게 동정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교회증언 3권, 416).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베드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설교와 지도력 그리고 그가 행한 이적들은 비범하였으며, 많은 이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기여하였다.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것처럼, 그는 구주와 같은 방식으로 죽는 영예를 얻었다(요 21:18).

 

 

교훈: 죄책감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회개와 변화로 이끌기도 한다.

 

 

부가적용)

죄라는 말이 두 가지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는 법을 어긴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빚』을 걸머진다는 뜻이다. 나타니엘 호오손의 『주홍글씨』에는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비극적 최후를 마치는 젊고 유능한 딤즈데일 목사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가 다 이 양심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당하지만. 이 양심이 없었던들 이 세상은 이미 망한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죄는 양심의 문제이다. 그러면 죄가 법을 어김으로써 생긴다는 말의 뜻은 대체로 알아듣는다 하지만. 범죄가 곧 빚을 걸머진 상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죄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살인강도나 사기횡령뿐 아니라. 시기와 분쟁. 악담과 분노 이러한 모든 죄도 다 이웃에 대하여 무서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이 일일이 빚으로 치부되는데. 도무지 갚을 길이 없으니 한심합니다. 인간의 과거.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동판에 아로새긴 기록 같아서 지울래야 지울 수도 없고 고칠래야 고칠 수도 없다. 과거는 과거이어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옥중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괴롭고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를 말소시켜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죄가 이제는 문제가 아니다. 그처럼 관대한 처분에는 오직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너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간단한 조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 빚을 갚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안할 수 없는 일이다. 이웃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만이 우리 자신의 모든 추악한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베드로의 좌절과 회개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베드로는 자신만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주님을 부인하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단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실패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간혹 우리도 신앙적으로 실패하며 좌절합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적용 |

신앙적으로 낙담하고 죄책감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그대는 어떤 경험을 말해 주고 싶습니까?

 

• 영감의 교훈 •

▶ 세리처럼 회개하라

“그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시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통회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환점에 이르러 베드로는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였다. 그는 세리처럼 통회하고 회개하였고 세리처럼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그를 바라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에게 용서를 보증해 주었다”(실물교훈, 152).

 

• 기도 •

하나님, 저는 ‘연약한 인간’라는 말이 의를 행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핑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도 쓰러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합니다.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목요일 1월 27일

완전한 용서

 

 

도입)

'미네소타 크리스챤 크로니클' 이라는 잡지에 실린 이야기이다. 킴 푹 여인은 베트남 여인으로 월남 전쟁 당시 살을 태우는 무서운 네이팜 폭탄이 떨어진 마을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와 생존한 사람이다. 그가 유명인사가 된 것은 우연히 종군기자의 카메라에 그 도망치는 모습이 찍혀 전 세계 여러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다. 1996년 워싱턴에선 월남전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는데 킴 푹 여인이 초청되어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연설에서 민간인 마을에 폭탄을 투하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면 그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죤 머플러라는 비행기 조종사가 참석하여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정말 죄송합니다...제가 그 조종사입니다. 저의 오판으로 고통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일로 인해 전 그동안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용서해 주시오. 용서해 주시오" "용서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들 용서를 빌고 용서하는 감격스런 장면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자기와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 그 당사자를 킴 푹 여인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는지, 신문은 그녀가 월남전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비행기 조종사 역시 오래전부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누구든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 약속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용서는 너무 크고, 깊고, 넓어서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우리를 위한 약속들을 주장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예비해 두신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용서가 이루어진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어려운 개념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은 비유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엘스토우 수도원(the Abbey of Elstow)의 한 유리창에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 색유리(stained glass)로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서 소설의 주인공 크리스챤은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의 무거운 죄책감은 어깨에서 굴러 떨어졌고, 그의 영혼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다. 그때 크리스챤이 말한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도다.” 무거운 짐은 사라졌다. 고통과 괴로움, 걱정과 수치심은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우리의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자아와 결함이 많은 인간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하고 포괄적인 용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의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와 정결케 하심을 받기 원합니다. 아멘.”

 

 

교훈: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교훈)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강물은 육지의 여러 곳을 통과해 오는 동안 온갖 더러운 쓰레기와 폐물, 오물과 배설물, 세균과 독극물 등으로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바다로 흘러 들어오나 바다는 그 더러운 것들을 하나도 마다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 짠 염수로 정화하여 깨끗한 해수로 만들어 버린다. 이와 같이 인간 세계 각계각층에서 생성되는 모든 죄라 해도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오기만 하면 자비라는 염수로 깨끗이 정화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염수로 만들어 버리신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더러워진 육신의 생각을 세상적인 지식이나 교양이나 덕망으로 정화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깊이 뛰어들어 자비의 염수로 정수되도록 해야 한다. 육신의 골짜기에서 더러워진 영혼이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 그 영혼의 대해에는 자비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부가예화)

차머즈라는 사람은 그의 책 “정오의 강풍”에서 유명한 건축 기사 피어홈의 긍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사 피어홈은 세계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들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뒤에 질병과 실패로 인해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였다. 그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험하므로 피어홈은 자꾸 경고를 했지만 오히려 번번히 모욕만 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는데 그 개가 하필이면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이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개의 주인을 비난하고 파종기가 되었어도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다. 노인이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냉소했다.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는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은 보았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광에 가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꺼냈다. 피어홈은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다.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긍휼은 우리들이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께서 그대의 죄를 얼마나 완전하게 용서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하셨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의 흔적과 기억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완전한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은 용서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확신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영역으로 옮긴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이 그런 차원으로 용서하겠다면 믿어야 합니다.

 

 

| 적용 |

하나님의 용서가 완전하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용서는 어느 정도로 완전해야 합니까?

 

• 영감의 교훈 •

▶ 용서에는 믿음이 필요함

“누구든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다윗처럼 겸비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들인 자는 용서를 받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회개하는 영혼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726).

 

 

• 기도 •

하나님, 그동안 마음에 담았던 모든 죄책감, 번민, 기억들을 이제 다 내려놓습니다. 아버지의 영원한 용서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믿고 감사드립니다.

 

 

 

금요일 1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죄가 마음을 지배하고자 다투고, 죄책감이 영혼을 짓누르며 양심을 무겁게 하고, 불신이 정신을 어둡게 할 때, 빛을 비춰 주실 분이 누구인가? 누가 죄를 정복하기에 넉넉한 은혜를 베풀며, 그대의 모든 죄를 사하며 소중한 용서를 주심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 소망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가? 바로 죄를 사하시는 구주 예수시다. 그분은 하늘 법정에서 여전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하나님 안에 보관해 둔 자들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일어나 그들에게 비추기 때문이다”(엘렌 G. 화잇, 바이블 트레이닝 스쿨, 1915년 5월).

“만일 그대가 친구나 이웃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그대는 그대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그대를 거리낌 없이 용서해 주는 것은 그의 의무이다. 그 후에 그대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상처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에게 손해를 입힘으로 그의 창조주요 구속주에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교회증언 5권, 12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아직도 과거의 일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주겠습니까? 그대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➋이번 과 목요일 소지를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를 묘사하고 있는 여러 표현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깊이를 묘사하는 자신만의 표현이 있다면 반생들과 함께 나눠 봅시다.

➌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회개에 이르도록 죄책감을 이용하십니다. 죄책감의 긍정적인 역할이 또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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