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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쁜 소식!!! 산상보훈!!! 8 복!!! (1)
작성자
정무흠
작성일
2011-01-12
조회
9483

 
   
2장 팔 복
 

6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2, 3절).

방랑하는 무리들의 귀에는 이 말씀이 신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들린다. 이런 교훈은 그들이 지금껏 제사장이나 랍비에게서 듣던 것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들은 이 교훈에서 자만심을 높여 주거나 야심을 길러 주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새 선생에게는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거룩한 사랑의 향기가 꽃향기처럼 그분이 계신 바로 그 곳에서 흘러나온다. 그분의 말씀이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시편 72편 6절)같이 흘러나온다.

모든 사람은, 영혼의 비밀을 다 아시면서도 따뜻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오시는 분이 계심을 직감한다. 그들의 마음이 그분을 향해 열려지고 그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성령께서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필히 배워야 할 교훈의 의미를 얼마간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 당시에,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보화를 가진 부자인 줄 알았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누가복음 18장 11절)고 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가 속한 부류는 물론 크게는 국민 전체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 가운데는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느낀 자들도 더러 있었다. 7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이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는 이적을 통해 드러나자, 베드로는 구주의 발 앞에 엎드리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장 8절)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그 산 위에 모여 있던 무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순결 앞에서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요한계시록 3장 17절) 깨달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디도서 2장 11절)를 갈구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사말은 이들 영혼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음을 알았다.

예수께서는 “부자라 부요하여”(요한계시록 3장 17절)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축복의 잔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들은 조소로써 그 은혜의 선물을 외면하였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이 꽤 선량한 줄로 생각하고 현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참예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은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또 그분께서 오셔서 주시고자 하신 무한한 축복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 스스로를 부요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여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풍족하다고 생각하므로 빈손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고 스스로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당신이 용서하시는 사람을 뉘우치게 만드신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8 그들은 지금껏 해온 모든 일이 이기심과 죄로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가련한 세리처럼, 그들은 멀리 선 채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18장 13절) 하고 부르짖는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주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한복음 1장 29절)이시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장 18절).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에스겔 36장 26, 27절).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일시적인 지상 왕국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의를 가진 영적 나라를 개방해 놓고 계셨다. 메시야의 주권을 나타내는 기(旗)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것은 인자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백성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희 것이다. 비록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으나, 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골로새서 1장 12절) 할 사업은 이미 그들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

자기 심령의 처참한 빈곤을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의와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신다. 9 그분은 그대의 궁핍을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과 바꾸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것은 물론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할 수도 있으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속절없고 낙담한 현 상태 그대로 예수께 나가면, 우리의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아 당신의 사랑의 팔과 의의 두루마기로 감싸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품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소개시키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간구하신다. 내가 대신 저 죄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하는 이 자녀를 보지 마시고 나를 보아 주십시오. 사단이 죄를 들추며 우리의 영혼을 크게 대적하고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 그리스도의 보혈은 더욱 강력하게 호소한다.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이사야 45장 24, 25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4절).

여기서 애통이라고 하는 말은 진정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장 32절)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10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이런 애통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그분을 통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며 그 곳에다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구주의 말씀에는 재난이나 사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도 있다. 우리의 슬픔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예레미야애가 3장 33절).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브리서 12장 10절)기 위함이다.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임이 판명될 것이다. 세상의 쾌락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슬픔을 당하여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분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의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런 과정이다. 또, 회전 연마기(硏磨機)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게 준비되어 나온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진다.

11 주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신실한 자는 귀중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며, 고귀한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결코 무심하지 않으시다. 다윗이 감람산에 올라가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사무엘하 15장 30절)할 때, 주께서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를 보고 계셨다. 다윗은 베옷을 입었으며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겉으로 나타난 그의 겸비(謙卑)는 그의 회개를 증거해 주었다. 그는 울먹이는 말로 자기의 사정을 하나님께 고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윗이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께 가장 사랑스러워 보인 때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아들에게 선동되어 반역에 가담한 원수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마음에 찔림을 받은 때였다. 주님께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장 19절)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에 힘을 주시고 슬퍼하는 심령을 고결하게 하심으로 마침내 당신께서 거할 수 있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환난을 당할 때 야곱과 같이 할 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것을 원수의 손으로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힘이 다할 때까지 무모하게 싸우지만, 아무런 위로나 구원을 발견하지 못한다. 새벽에 천사에게 일격을 맞은 야곱은 지금껏 싸우던 자가 언약의 천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절없이 울면서 그의 영혼이 갈망하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분의 품에 안겼다. 우리도 시련이 유익이 됨을 배우며, 주님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책망 받을 때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2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기 5장 17~19절). 예수께서는 상처를 입은 모든 사람을 찾아 치료해 주신다. 사별과 고통과 고난의 생애도 그분의 황홀한 임재 앞에서는 환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 못할 슬픔과 아프고 상한 마음으로 짓눌려 있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당신의 자애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게 하신다. 거룩하신 구주께서는 눈물로 앞이 가리워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곁에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을 꽉 붙잡길 원하신다. 그리고 또,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했으면 하고 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슬픔과 비애와 시련을 향하여 열려 있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애로운 손길로 우리를 감싸 주신다. 우리는 마음을 그분께 바치고 온종일 그분의 자애를 명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매일 당하는 슬픔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평화 가운데서 살게 해주실 것이다.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 자녀들이여, 이것을 생각하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장 4절).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의 슬픔을 애달파 하고 그 죄를 슬퍼하여 우는 자들 역시 복이 있다. 이 같은 애통에는 자신을 생각하는 일이 전혀 개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분이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찢기고 상하셨다. 그분은 인류의 궁핍과 불행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아(無我)의 열성으로 일하셨다. 그래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당신께 나오기를 거절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는 늘 애석함으로 마음이 무거우셨다. 13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은 경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그분의 수고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일하고 그분과 함께 슬픔의 잔을 마심으로 그분의 기쁨에도 참여하게 된다.

예수께서 위로의 봉사를 하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였다. 그분은 인류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같이 당하신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장 18절; 이사야 63장 9절).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봉사 사업에 참여할 특권을 부여 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린도후서 1장 5절).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줄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계시며, 그 은혜의 능력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상하고 터진 마음에 통로를 열어 주며 슬퍼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유향이 된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후서 1장 3, 4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장 5절).

팔복에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쌓아가는 길이 사방으로 나 있다. 그리스도의 필요를 깨닫고, 죄 때문에 애통해 하고, 그리스도와 고난의 학교에 함께 앉은 사람들은 거룩한 교사에게서 온유를 배우게 될 것이다.

14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모세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한 말, 다시 말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그 당시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연민이나 조소를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신다. 그분의 생애와 품성 속에는 이 귀한 덕성의 거룩한 미(美)가 나타나 있다.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립보서 2장 6, 7절)기로 작정하셨다. 생애의 온갖 미천한 경험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되 왕으로서 충성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분의 태도에는 고집이나 냉혹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천사보다 더욱 위대한 특성을 소유하셨으나, 그분의 신성한 존엄성에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는 온유와 겸손이 혼합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그래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셨다. 지상에서의 사명이 거의 끝날 무렵,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할 수 있으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복음 17장 4절). 그런 그분께서 이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장 29절). 15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태복음 16장 24절), 자아를 물리치고 이것이 더 이상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극기와 그분의 겸비한 마음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니엘이 인자와 같은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다니엘 10장 8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자립과 자존은 사단의 속박의 표로서, 참으로 비열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 한다. 그리하여 심령 속에 안정이 깃든다. 자아가 심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 채 그분의 손이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기다린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을 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거하는 손님으로 영접할 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지켜 줄 것이다. 지상에서의 구주의 생애는, 비록 투쟁의 와중에서 보낸 것이라도 평화의 생애였다. 분노한 원수들이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중에도, 그분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장 29절)고 말씀하셨다. 16 어떤 인간적인 소동이나 사단의 분노도 이같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으로 얻어지는 안정은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장 27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장 29절). 나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향상을 위한 봉사의 멍에를 메라. 그리하면 그 멍에가 쉽고 그 짐이 가벼움을 깨닫게 되리라.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괘념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린도전서 13장 4~8절).

세속적인 근원에서 나온 행복은 그 행복을 이루어 주는 다양한 환경과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평안이다. 그것은 생애의 어떤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재물의 양이나 세상 친구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수의 근원이시므로, 그분께로부터 얻은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정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온유는 집안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다툼을 방지해 주며, 화를 내며 대답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흥분을 진정시켜 주며, 그 매력을 감지할 수 있는 반경에 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17 온유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세상의 가정들을 하늘에 있는 큰 가정의 한 부분이 되게 해준다.

원수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誣告)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이다. 마음의 겸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는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다.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 149편 4절).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요한계시록 3장 21절).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시편 37편 11절)게 될 때,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그 땅은 사망과 저주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이 세상과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장 13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요한계시록 22장 3절).

그 곳에는 실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도 없고, 병들었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 곳에는 장례 행렬도 없고, 탄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도 없다. 단지 예수께서 거기 계시며, 평화가 거기 있다. 그 곳에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이사야 49장 10절).

1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6절).

의는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요한일서 4장 16절)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편 119편 172절)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로마서 13장 10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

의는 고통스런 투쟁이나 지치게 만드는 수고, 그리고 선물이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고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모든 영혼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사라”(이사야 55장 1절).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장 17절).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예레미야 23장 6절).

인간의 어떤 힘도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것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장 35절).

19 육체적 힘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할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온 떡, 곧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육체가 생명과 활력을 유지해 주는 양분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도 그리스도로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분께 순종하고 완전히 의존해야 한다.

피곤에 지친 여행자가 광야에서 샘을 찾다가 찾으면 기갈을 푸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가 근원이신 생명의 정수(淨水)를 갈급함으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 구주의 품성의 온전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어 그분과 같은 순결한 모습으로 새로워지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품성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편 62편 5절)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게 될 때, 하늘의 요소와 인간의 요소가 합해진다.

만일, 그대가 마음 가운데 어떤 부족을 느낀다면,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대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대를 위하여 해주시고자 그대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얕은 개울가에서 해갈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큰 샘이 바로 우리 위에 있으며, 우리가 믿음의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그 풍족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20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샘이다. 그 생명의 샘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그대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통을 나누게 된다. 잘 아는 진리가 새로운 측면에서 그대의 마음속에 제시되고, 성경의 구절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섬광처럼 마음속에서 작열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대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이 구속 사업과 갖는 관계도 깨닫게 되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며 거룩한 선생이 그대 곁에 계신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그대에게 진리를 제시해 줄 때, 그대는 가장 가치 있는 경험을 쌓게 될 것이며, 그대에게 계시된 위로되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과 교제하게 될 때, 그대는 그리스도의 품성이나 사업에 관한 어떤 새로운 사상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과 사랑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갖게 될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누가복음 6장 38절). 이와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아가 4장 15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그 사랑을 더욱 많이 받고자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그래서 나누어 주게 되면 더욱 풍성하고 더욱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깨닫고 사랑하는 능력을 증가시켜 준다. 영혼의 계속적인 부르짖음도 “더욱”이고, 성령의 응답도 “더욱”이다(로마서 5장 9, 10절). 21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에베소서 3장 20절)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온 마음을 바칠 때는 누구나 그것을 받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고 친히 명령하셨다. 이것은 명령이면서도 이 명령 자체의 성취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거하게”(골로새서 1장 19절) 되고, “그 안에서 충만하여”(골로새서 2장 10절)지는 것이 아버지의 큰 기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소생시키는 소낙비처럼 당신의 사랑을 무제한으로 부어 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이사야 45장 8절).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이사야 41장 17, 18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한복음 1장 16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5장 7절).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된다. 22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음이라”(요한일서 4장 19절).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출애굽기 34장 6절)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하여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구속하려 하신다. 당신의 섭리를 따라 나타내시는 엄격함도 실은 완악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고자 심히 갈망하신다. 하나님께서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애굽기 34장 7절)으심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죄는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 시험을 당하는 자들, 궁핍과 죄의 희생물이 된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그들을 도와 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그는 가장 가련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구원하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켜 화목의 봉사를 하도록 하신 영혼들을 본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23 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욥기 29장 12~16절).

생애 자체가 고통스런 투쟁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늘 부족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불신을 나타낸다. 자신들에게는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투쟁하는 고독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친절한 말과 동정의 표정과 감사의 표시는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과 같을 것이다. 동정의 말 한 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는 피곤한 어깨에 무겁게 지워져 있는 짐을 치워 줄 것이다. 따라서 사심이 없는 모든 친절한 말과 행동은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장 25절).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의 생애에는 동정심을 가지는 데서 오는 만족스런 평안 즉 즐거운 만족이 있다. 영혼 속에 거하시고 사람의 생애에 뚜렷하게 나타나시는 성령은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동정심과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준다. 그대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24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시편 41편 1~3절).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봉사로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는 자는 누구나 우주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분과 연결된다. 그의 생애는 변함없는 언약의 황금 고리로써 하나님의 생애와 하나로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궁핍의 시간에 그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장 19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긍휼히 여기시는 구주의 자비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고 영원한 거처로 영접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8절).

유대인들은 의식상 청결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였기 때문에, 규칙들이 대단히 번거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규칙과 제약과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불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기심과 악의에 의해 심령에 얼룩지는 오점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이 의식상 청결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음의 청결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야고보서 3장 17절)이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곳 거민이 될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이 청결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주의한 행동과, 무례한 말과 조잡한 생각을 멀리 하는 경향이 차츰 나타나게 될 것이다. 25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면, 말과 생각과 행동이 순결하고 고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만 항간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육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며, 교만과 자아 본위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고 어린애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질이 같아야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이 되는 자아 희생적 사랑의 원칙을 생애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단에게 기만당한 마음은 하나님을 포학하고 잔인한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의 이기적 특성은 물론, 심지어 사단의 이기적 특성까지도 자비하신 창조자의 특성으로 간주된다. 그분께서는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편 50편 21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전체적이고 징벌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의 보고(寶庫)인 성경 역시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늘처럼 높으며 영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상 진리들의 영광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이사야 53장 2절)는 분으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계시로 사람들 가운데 계셨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분에 대하여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요한복음 8장 48절)고 주장했다.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완전히 눈이 어두워져서,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오신 그분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였다. 26 예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하게 다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분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하늘뿐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악한 자들은 그분을 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임재의 빛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되지만 불경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된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히브리서 10장 27절) 것이 된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의 얼굴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심으로 정결하게 된 마음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바위틈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때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나타나지 않을 때이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언 22장 11절).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믿음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일의 경험 가운데서, 그분의 섭리에 나타나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품성을 통하여 그분을 이해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또 그분이 보내신 분에 대한 진리를, 잘 이해하고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개해 주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구속주로 받아들이되 새롭고 절친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품성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들을 통해 반영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그분을, 회개한 아들을 포옹하고자 원하는 아버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늘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으로 창조된 업적과 우주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를 식별한다. 27 그들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더욱 분명히 읽게 된다. 지혜 있고 현명한 자들에게 감추어진 진리들이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된다. 진리의 아름다움과 귀함이 세상의 현자들에게는 식별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행하고자 하는, 믿음과 단순함이 깔린 열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펼쳐지고 이해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됨으로 진리를 분별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주신 시간 동안 마치 그분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애 한다. 그들은 또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이야기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장차 불멸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린도전서 13장 12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9절).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사야 9장 6절)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깨뜨린 화평을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장 1절).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은 이 하늘의 화평의 참여자가 된다.

이 외에는 평화의 기반이 달리 없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은혜는 적의를 제거하여 준다. 왜냐하면 분쟁을 완화시켜 주고 심령을 사랑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28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질투가 마음속에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예한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으로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다. 화평의 정신이 세속적인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슬과 같이 내릴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평화의 기별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진다. 자신도 몰래 조용히 거룩한 생애의 감화를 끼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것이다. 언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자는 누구나 화평케 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의 정신은 그들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가 그들을 두르고 있다. 생애의 향기와 품성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한일서 4장 7절).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장 9, 14절).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미가 5장 7절).

29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복음 5장 10절).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영광과 부를 얻고 시련이 없는 생애를 맞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시는 대신에, 세상이 그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극기와 굴욕의 길을 걷는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적인 원수들의 연합 세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은 단숨에 해치우려는 마음으로 동맹을 맺고 평화의 왕을 대적하기 위하여 대오를 가다듬었다. 그분의 모든 언행이 하나님의 자비심을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같지 않은 그분의 모습이 더할 수 없는 적의를 품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 악한 정욕이 발휘되도록 방종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가장 격렬한 반대와 적의를 불러일으키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다. 의와 죄, 사랑과 증오,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결의 미를 나타낼 때, 그것은 사단의 나라에 속한 백성을 빼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악의 왕이 그것을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박해와 치욕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 있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자 애쓸 때, 그들은 십자가에 대한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0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하늘의 법칙에 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대오(隊伍)를 벌이고 있다. 그러므로 핍박은 슬픔의 원인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주셨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명기 33장 25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장 9절). 만일, 그대가 예수님을 위하여 시뻘겋게 단 풀무 속을 지나가도록 요구당한다면, 그분께서는 바벨론에서 진실한 세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그대 곁에 계실 것이다. 구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굴욕과 치욕을 당할 때마다 기뻐할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위해 받는 고통을 달게 여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 왔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고 죽였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사단보다 더 강하신 분을 나타내었다. 사단은 고문하고 몸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감옥의 벽 속에 감금시킬 수는 있었으나 정신은 속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둠 저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장 18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장 17절).

31 하나님의 영광 곧 그분의 품성은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에 의해 시련과 핍박을 통해 나타난다.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된다. 그들은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한다. 그들은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죄의식을 일깨워 주고 죄로 인한 비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므로, 그들은 죄를 가증하게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됨으로 그들은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선지자는 거룩한 이상(異像)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를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요한계시록 15장 2, 3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요한계시록 7장 14, 15절).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장 11절).

사단은 타락한 이후 기만을 통해 활동해 왔다. 그는 하나님을 그릇되게 나타내 온 것처럼, 그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릇되게 나타내고 있다. 32 구주께서는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편 69편 9절)고 말씀하신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훼방이 미치게 된다.

대중과 함께 어울린 사람들 중에서 인자보다 더 혹독하게 비방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원칙에 변함없이 순종하였기 때문에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셨다. 그들은 까닭 없이 그분을 미워했다. 그러나 그분은 원수들 앞에 태연하게 서서 비난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받을 유업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표명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악의 화살에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며, 핍박을 당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셨다.

비방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수는 있으나 품성을 더럽힐 수는 없다. 품성은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신다. 우리가 범죄하고자 마음먹지 않는 한, 사람의 능력이든 사단의 능력이든 간에, 심령을 더럽힐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심지(心志)가 견고한 사람은 가장 고통스런 시련과 가장 절망적인 환경에 놓일 때에도 번영 중에 있을 때 곧 하나님의 빛과 은총이 그에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때와 동일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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