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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과 대면한 낙오자의 인생역전!!!
작성자
정무흠
작성일
2010-11-26
조회
15627

다음 글은 사망의 문턱에서 창조주를 만나 인생역전을 체험한 저희 외숙부님의 간증입니다! 78세에 태국을 방문하여 대학에서 영어공부하시며 Report로 쓰신 것을 제가 읽고 큰 감동을 받고, 외숙부님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grkasda.com에 올린 글입니다.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934년 나는 한반도 남동쪽 지방의 8자녀를 둔 보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한국은 일본의 점령하에 있었는데, 일본의 압제는 한국 백성들의 삶을 매우 힘들고 불행하게 했으며, 긴장과 원한이 전국 도처에 편만했다. 많은 애국자들이 살해당했으며 살아있는 애국자들은 중국 동북부 지역인 만주로 피신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중요한 직책과 특권을 가졌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한국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한국 학생들이 학교에서 모국어로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로 말하도록 강요했다. 규율을 어기면 벌금을 내야 했다. 일본은 한국을 일본으로 흡수시키고 한국을 땅위에서 영원히 멸절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 환경 때문에 나는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반감 가운데 자라났다. 나는 필연적인 시대의 산물이었다.

내 가 6학년 때, 일본은 UN군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대한민국은 여러 해 동안 일본 점령하에 있던 다른 여러 아시아 나라들과 함께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며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 날은 우리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환희화 흥분의 날이었던가! 나는 그날의 기쁨과 행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과 흥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러시아 군대가 북한에 미국 군대가 남한에 진주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UN 신탁통치국이 된 것이었다. 신탁통치가 끝나고 총선을 하게 될 때 우위를 점하려고 북과 남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내부 투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한반도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졌다. 마침내 남과 북은 각각 독립 정부를 수립하였고, 통일은 멀어져 갔다.

그 리고 예기치 못했던 한국 동란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우세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준비되지 못한 남한을 기습 공격하였다. 10일 이내에 남한의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물결처럼 남쪽으로 피란을 갔다. 17세 이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군대에 소집되었는데, 나는 16세였음으로 군대에 소집되지 않았고, 10학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학생 중 하나였다. 학교는 모두 문을 닫았고, 학교 건물들은 전쟁에 관련되 일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휴교가 1년 반이나 계속된 후에 우리는 가교사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6개월 후에는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식날(1952)이 까까와오자 나는 입대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나의 동급생 중 몇명은 이미 전쟁터에서 죽었다.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였다. 4년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 해군 장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입학시험을 쳤고,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꽤 힘든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음으로 나의 아버지는 아주 기뻐하셨다. 모든 합격생들이 한반도 남쪽 진해만에 위치한 해군 사관학교에 도착한 후, 우리는 정규적인 학교 수업을 받기 전에 3개월 동안 소위 "지옥훈련"이라 불리우는 격렬한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한 달 동안의 격렬한 훈련 후에 나는 병이 들어 해군 장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계속적인 설사로 한 달동안 입원한 후 퇴원하였다. 나의 건강이 학교의 기대에 못 미쳤음으로 나는 퇴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제 나는 낙오자로서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날 때, 크게 상심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망가진 몸과 심령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나에게 아주 친절했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특히 아버님께 죄송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분이셨고, 종교는 없었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깊이 수련된 도덕심이 높은 분이셨다. 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훈계와 감동적인 이야기들과 체벌로 자녀들을 신실하게 훈육하셨다. 반면에 어머님은 아주 온화하고 유순하시며 아버님께 전적으로 복종하셨다. 나는 내 생애에 어머님이 아버님과 언쟁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체중이 많이 감소되었다. 나는 날마다 쇄약해져 갔고, 몸은 앙상하고, 얼굴은 창백하였다. 호흡이 가빳고 열이 났다. 열이 나고 숨이 차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피란온 무면허 의사를 불렀는데, 심한 폐결핵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 집에 규칙적으로 와서 주사를 놓고 약을 주고 갔다.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다가 다시 악화되었다. 이 고투의 시기에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계속적으로 생각했었다. 끝없이 똑딱이는 벽시계 소리를 헤아리며 병상에 누워있을 때, 나의 삶의 종착점에 이렀다고 느껴졌고, 죽음을 대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겨우 20세였고,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전율하였다. 나는 나의 큰 형님의 죽음과 할아버지의 죽음과 세째 형님의 죽음을 목격하였었지만, 나에게 죽음이 닥쳐오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은 두려웠고, 나 자신을 아주 불안하고 초조하게 했다. 죽음 저 편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래의 삶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악에 대한 심판과 선에 대한 그 어떤 보상이 있으리라고 느껴졌다. 심판과 보상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의 삶은 무의미하고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는 양심과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했다. 유물론적인 세계관은 나에게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갈급한 영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 인간은 육체적인 면 뿐만아니라 끊임없이 활동하는 양심을 가진 영적인 존재다. 우리는 짐승과 다르다. 짐승에게는 양심이 없다. 그 누가 인간에게 양심을 주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셨단 말인가? 우리에게 양심을 주신 그 분이야말로 진리와 의의 근원이시다. 그 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다. 나는 그 분을 찾아야만 한다. 그 분이 불교의 신이든 기독교의 신이든 모슴렘교의 신이든 다른 어떤 종교의 신이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 분을 만나 바른 도를 깨닫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조만간에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발견하고 평안히 죽기를 원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때로는 불교식으로 때로는 기독교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끊임없는 짧은 기도는 "오, 신이시여! 당신이 계시다면 저에게 보여주소서. 그러면 흡족한 마음으로 평안히 죽겠나이다." 하루는 어머님께서 들어오셔서 병상에 누워 있는 나의 곁에 앉으셔서 초최한 내 얼굴을 들여다보셨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어머니의 슬픈 눈은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하였다. 어머니의 명백한 눈빛을 통해 "나는 결코 너를 죽게 버려둘 수 없다"라는 불굴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위를 쳐다 보는 눈물이 가득한 나의 두 눈은 어머니의 불굴의 소망에 반응하여 "어머니, 나는 포기하지 않을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나는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응답했다.

나는 신약 성경을 얻게 되었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읽는 성경의 뜻을 설명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는 진리가 나에게 계시되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다. 그 후 1954년, 여명이 비쳐왔다. 어느 안식일 오후 학생들이 우리집을 찾아와 문서전도하며 우리 가족을 교회로 초청하였다. 뜻밖에도 나의 엄격한 아버지께서 집안 일을 돌보아주던 19살 난 처녀 방우(고아로서 여러해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아온 나의 수양 누이 동생)가 교회에 가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그 학생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삼육학교 학생들이었다. 내가 폐결핵에서 회복되고 있는 동안(적절한 치료의 결여와 영양실조로 대부분의 결핵환자들이 죽던 가난한 시절)방우는 한 주일에 3번, 화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에 신실하게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나는 방우가 교회에 가고 오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정말 교회에 가고 싶었지만 아무도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내가 병들었기 때문에 나의 부모님들도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은 결코 생각하지 않으셨다. 어느날 저녁 내가 평상에 앉아 있을 때, 화요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방우를 보았다. "교회가 어떠하더냐? 재미 있더냐?"라고 방우에게 물었다. 방우는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교회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도 교회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오빠가 교회에 오면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행복해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1954 년 3월 5일, 내 생애 처음으로 교회에 참석하였다. 그 교회는 약 100명의 학생들과 교사들과 가족들이 주요 멤버인 학교 교회였다. 그리고 지역 사회 신자들이 몇 사람 있었다. 이 역사적인 금요일 저녁 예배에 한 교사가 아담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설교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 어떻게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지 설명하였고,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땅과 공기 속에 다 있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숨이 죽음과 생명의 차이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셨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실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합리적이었고, 나는 성경 공부를 더 하고 싶은 큰 소망을 갖게 되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첫번 째 가르침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과 땅위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내가 이 사실을 날마다 묵상할 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은 자라갔다. 이른 아침에 강둑을 산책할 때, 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아침해가 떠오른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누리의 놀라운 창조주께 감탄과 찬양을 돌리며 나 자신에게 말하였다: "네가 바른길로 들어섰도다. 이 세상은 뜻과 목적이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구하고, 너의 생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라."

나는 안식일학교 교과공부 지도서를 아주 주의 깊게 공부하고 다음 안식일학교 교과 공부 시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때로는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신가? 하나님이 참으로 성육신하셔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셨는가? 나의 굳건하지 못한 믿음 때문에 때때로 마음에 갈등이 있었다. 의심이 나의 마음을 엄습할 때마다 나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질문하였다. "너는 진실로 창조의 기적을 믿느냐?" "예, 나는 믿습니다."라고 나는 답하였다. 그 음성은 나에게 다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취하시고 성육신하신 기적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성경을 공부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신약에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다니엘 2장의 예언들이 세계 역사에서 확실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성경통신학교를 통해 때의 징조들을 공부할 때, 나는 마태복음 24:29을 읽게 되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해와 달이 어두워졌다. 1780년 5월 19일 그 놀라운 암흑일은 하바드 대학교의 사무엘 윌리암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날에 "사람들은 대낮에 여러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가정집들에는 촛불이 켜졌고, 새들은 저녁 노래를 부르며 사라졌고, 닭들은 홰에 올라갔으며, 수탉들은 새벽이 온 것 처럼 울어댔고, 가까운 곳에서도 사물을 분별할 수 없었고, 모든 것이 밤중처럼 어두웠다." see Memorie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through 1783), vol. 1 pp, 234, 235.

어떤 이유로 그 현상이 일어났든지 간에, 암흑일은 그 현상이 있기 17세기 전에 예언되었고, 마지막 때의 징조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구에 있는 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를 방문하여 옥스포드 영어 백과사전을 열어 암흑일 "Dark Day"를 찾아보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1780년 5월 19일에 설명할 수 없는 흑암이 미국 동북부를 덮었는데, 아마도 카나다의 산불에 의한 것 같다." 그와 같은 성경 예언 성취는 나의 믿음을 크게 강화시켜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안식일 문제로 믿음의 선한 사움을 싸웠었다. 성경은 제칠일이 거룩하게 지켜야할 안식일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학교와 관공서가 안식일에 쉬지 않았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했다. 사람들이 비웃고 가족들이 나를 고립시킬 것이었다. 내가 결정의 분기점에서 망설일 때, 그리스도의 음성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 14)

나는 나의 주님, 나의 구주께 "예, 주님! 천국에 이르는 그 날까지 주님을 따르리이다!" 라고 응답하였다.

1954 년 9월 27일에 나는 대한민국 경산, 흘러가는 강물에서 침례를 받았다. 진리를 추구한 지 6개월 후에 마침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발견했다. 내가 처음으로 진리를 추구한 지 어느덧 56년의 세월이 흘렀고, 주님은 나를 풍성하게 축복하셨다. 주님은 나의 병을 다 치유해주셨고,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편 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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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년 5월 14일 청운의 꿈을 품고 서북항공기를 타고 태평양을 넘어 미국으로 이민왔을 때, 앤드류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시던 외숙부님댁 학생 아파트에서 6주동안 함께 있었는데, 아침 저녁 가정예배를 자녀들 중심으로 흥미있게 드리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외숙부님 댁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딸 정현이와 아들 원제, 민제가 있었습니다.
외숙부님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으시고, 신선한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마다 온 가족이 함께 가정 예배를 드렸는데, 찬미부르고, 성경 말씀 읽고, 자녀들에게 짧지만 감동적인 말씀으로 교훈하고 축복 기도드린 후, 아침 식사하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저녁에도 함께 가정 예배드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해지기 전에 온 가족이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자동차도 깨끗이 씻고, 구두도 닦고, 정성들여 예비한 후, 기쁜 마음으로 거룩한 안식일 맞이하며 안식일 환영 예배를 드렸습니다.

토요일 아침에는 9시에 온 가족이 정장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러 교회로 갔습니다.  안식일 오후에는 앤드류스 대학 캠퍼스나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하며 자녀들과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이렇게 자녀들을 교육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날마다 가정예배에서, 안식일마다 교회에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들으며 자란 정현이와 원제와 민제는 장성한 후에도 교회에서 훌륭하게 봉사하는 신앙인들이 되었고, 사회생활에도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청소년 범죄가 증가하며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장래를 염려하며 안타까와하는 오늘날,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첫째 비결은 성공적인 신앙 교육! 성령충만한 삼육 교육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소아과 의사가 된 정현이는 구강외과 의사인 남편{빌리 정}과 함께 테네시주 칼리지데일 한인 교회 청소년 지도자로 봉사하며, 치과의사가 된 원제부부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응급실 전문의사가 된 민제는 치과의사인 아내와 함께 오레곤 주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정현이 부부와 민제 부부는 고국에 나가 한국 삼육고등학교 기도주일 강사로 청소년 들에게 힘있게 복음을 전하며 꿈을 심어주고 왔습니다.

아침 저녁 가정예배를 충실히 드리던 외숙부님댁 자녀들도 모두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결혼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도우며 보람되게 사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은혜로운 가정예배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신앙 유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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