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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난 검은 가방
작성자
현실을넘는삶
작성일
2010-05-31
조회
7153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바랜
옷.....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 질을 하는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교실 저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걸음 뒤어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 까지 친친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세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엄마..., 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 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히셨는지 국밥 한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다. 그저 색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기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말은 아니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만큼 온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한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막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둠 으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 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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