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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 이란의 마지막 샤 팔레비
작성자
이란
작성일
2010-05-15
조회
6299

현대 이란의 마지막 샤 팔레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 되었던 팔레비는 쿠데타,독재,부패,외세의 앞잡이 등으로 나쁘게 평가되지만 한편 으로는 이란의 근대화를 이끈 백색혁명을 추진했던 긍정적 평가도 가능하다. 그는 누구인가?

팔레비는 1919년 레자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팔레비 왕조를 세운 부친 레자샤는

투르크계 이민족인 카자르 왕조의 부패와 외세의존에 분노하며 자주적 근대화의 추진으로 옛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민족주의자 였다. 레자샤는 실제로 서구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모두 폐기 하는 한편 주변 아랍국가들과는 혼인을 통하여 결속을 다졌고  국토종단철도건설.여성의 히잡착용의무 폐지등 조국 근대화에 노력했다. 하지만 레자샤는 아리아인 혈통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독일과 유착  1941년 영국과 소련의 침략을 받고 강제로 퇴위 당했고 그의 아들 팔레비가 새로운 이란의 샤로 등극했다.

팔레비는 시작부터 영국과 소련의 압박은 물론 대내적 으로는 군주정 반대파 들의 적극적 활동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팔레비가 훗날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져준 미국 이라는 빅브라더에 집착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이란의 새로운 민족주의 지도자로 떠오른 모사데크는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영국계 석유자본에 대한 국유화를 추진함은 물론 약체였던 팔레비의 군주권을 더욱 제한하려 했다. 급기야 모사데크는 1953년 팔레비의 완전 축출을 시도하여 성공하는듯 했으나 불과 3일만에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며 이란판 3일 천하로 끝나고 팔레비는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

이후 팔레비는 아버지와 모사데크의 총리시절과는 달리 자주노선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친미노선으로 돌아섰고 미국은 그의 막강한 권력기반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유착관계가 성립하였다.자신감을 얻은 팔레비는 1963년 이란 현대사 에서 매우 중요한 백색혁명을 추진한다. 백색혁명은 매우 획기적인 변화였다. 오랬동안 지주제가 유지되었던 이란의 농지제도가 개혁되었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매우 혁신적 이게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백색혁명은 세속주의적 근대국가로의 개혁으로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아타튀르크를 모델로 하여 20세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란을 세계 5대강국중에 하나로 키우겠다는 팔레비의 원대한 꿈에서 부터 출발하였다.

또한 팔레비는 아랍인 들이 비록 같은 이슬람교도 이기는 하지만 고귀한 아리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란은 유럽인 들과 더욱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그가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에서 오랜 유학한 결과 였지만 일반 이란민중의 생각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이었다.

백색혁명은 이란을 분명 획기적 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지만 문제는 팔레비 그 자신 이었다. 케말파샤가 청렴한 생활로 국민의 존경을 받은것과는 반대로 팔레비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렸고 그뿐만 왕실가족의 사치와 방탕은 나라의 재정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또한 팔레비의 행정부는 효율적인 작은정부가 아니라 지나치게 방만한 큰정부 였으며 자연 국가의 재정도 어려워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팔레비는 백색혁명으로 인한 성장의 열매를 사회복지로 재분배 하지 않고 과도한 군비증강에 사용하는 누를 범하고 만다.

이러한 그의 실정은 이란민중들 사이에서 서구화 자체에 반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 이야톨라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팔레비는 1971년 건국 2500년 기념 대축제와 1974년 아시안게임 개최(이번 카타르 도하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전 까지 중동세계 에서의 유일한 국제대회 였으므로 매우 정치적 의미가 크다.)등 자신의 개혁 성과를 현대적 축제를 통해 전세계에 널리 알렸지만 이런 행사는 대내적 으로 이란국민들의 여론을 오히려 악화시켰다.

팔레비는 악화된 민심을 달래기 보다는 시아파 성직자들에 대해 강경한 탄압으로 맞섰지만 이는 더욱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을 키워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1979년 이란에서는 전세계를 발칵 뒤짚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는 실각하고 파리에 망명하였던 호메이니가 집권하여 과학과 합리론의 시대라는 20세기에 이슬람 종교 국가로 희귀 하고 말았다. 쫒겨난 팔레비왕은 유럽과 미국 라틴아메리카등을 전전하다가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이집트 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외세에 반대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한 이란 이슬람 혁명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팔레비의 실각과 호메이니의 집권은 이란국민들의 끝없는 고난의 행군의 시작이었다. 종교적 신념에만 불타고 외교를 몰랐던 이슬람 성직자들은 자국에서 혁명에 만족하지 않고 아랍세계의 시아파들을 연이어 자극했으며 그러면서도 팔레비가 키웠던 막강한 군대의 뛰어난 지휘관들을 모조리 숙청하여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전쟁중 에도 숙청은 계속되었고 이란의 막강한 정규군을 믿지못하여 민병대로만 전쟁을 치뤘다. 그결과 이란의 전사자는 이라크 전사자의 2배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결국 이런 상황은 야심가 사담후세인의 침략을 자초하였고 이란은 무려 8년간 이라크와 끝을 모르는 전쟁에 빠져들었다. 겨우 전쟁이 끝나고 그 어떤 협상도 거부하며 무모한 전쟁을 계속했던 호메이니도 전후 몇달뒤 죽었지만 미국의 기나긴 경제봉쇄로 팔레비 왕조때의 영화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여성들은 투표권을 잃음은  물론 다시 히잡을 써야만 했다. 시민적 자유권도 이슬람 율법앞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21C 이란은 여전히 미국과 끈질긴 핵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피폐된 경제는 다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못한다.

팔레비가 물론 사바크 라는 친위대를 조직하여 독재적 성향을 보인건 사실이지만 국민들의 사소한 일상 까지 간섭하는 지금 이란에서의 신정정치와는 비할바가 못된다. 그는 독재자 이지만 호메이니는 적어도 그보다 몇배 더 심한 독재자가 아닌가?

그렇다고 팔레비를 옹호하는건 아니다. 팔레비가 모델로 삼았던 케말파샤는 외세의 침략에서 터키를 구해낸 영웅일뿐만 아니라 팔레비의 아버지 레지샤 처럼 강대국들과의 불평등 조약을 폐기한 자주적인 인물 이었으며 또한 사심없는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은 그꺼이 그의 근대화 정책을 지지했고 그가 간혹 무리수를 두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추진했던 정책 이었지만 지도자가 자주의식을 가지고  솔선수범 하는 모습을 보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EU에 가입을 노리는 터키와 위험한 핵장난을 펼치고 있는 이란의 앞날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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